
이광수
(1892~1950)
1892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난 이광수는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1904년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일본으로 유학을 간 후
1915년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입학했으나
1919년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학업을 중단한다.
이광수는 이미 신한청년당에 가입했었고
당의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장편 소설
<무정>을 연재하기 시작한다.
<무정> 단행본은 1만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광수는
인기 문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이광수는 여운형의 추천으로
대한민국 임정에 참가하였으나
1921년 귀국하였고
1922년, 당시 월간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며
친일파의 길을 걷게 된다.
후에
동아일보 편집국장(1926~1931)
경성제국대학생(1926~1930)
조선일보 부사장(1933~1934)
를 지냈다.
1939년, 스스로 '가야마 미쓰로'로
창씨개명을 했고, 조선 문인 협회 회장을
맡는다.
이광수는 본격적을 친일 행위를 시작하는데
'가끔식 부른 노래'
'창씨와 나'
'내선일체와 조선 문학'
'지원병 훈련소의 하루'
'폐하의 성업에'
'모든 것을 바치리'
등 103편의 친일 문학을 기고했다.
이광수는 조선인의 정체성을 없애
민족을 개조해야만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광수는 그런 생각을 자신의 작품에 담았다.

'창씨와 나'
차별을 제거하기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으로 향산이라는 씨를 창설했다.
-창씨와 나 中-
이광수는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했고
해방 후 반민특위에 소환되어
다음과 같이 변명한다.
'내가 친일을 한 것은 부득이 민족을 위해 한 것이다'
이 말을 한 뒤 같이 반민특위에 소환된
최린에게 '입 닥쳐' 라는 말을 들었다.
1950년 이광수는 죽었지만
아직까지 가장 유명한
친일 문인으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