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통(龐統). 자(字)는 사원(士元)이고 양양(襄陽) 사람이다.
제갈량, 법정과 함께 유비가 천하의 한 축으로 오르게 한 책사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역시나 요절했기 때문에 너무 과대평가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진수는 과대평가한 것이 아니라고 여긴 모양이다. 정사에서는 법정과 함께 둘이서 한 권을 이루었다. 즉 진수는 방통의 후예를 법정으로 보았고, 둘의 능력을 어느정도는 동렬에 두어 평했다는 것.
흔히 삼국시대 요절은 오나라 도독라인과 대장라인이라고들 말하지만, 촉한 역시 만만치 않다. 물론 이릉대전에서 죽어 요절한 자 들도 많지만
법정은 45세에 자연사했고, 방통은 36세의 나이로 전사했기 때문.
제갈량을 포함한 세 사람과 유비가 조금 더 살았다면 삼국의 판도가 변하지 않았을까 안타까워 하는 것도 당연하다 본다.
군자와 소인 중에 누가 요절하는지 장수하는지를 보면 세도(世道)가 비색(否塞)한지 통태(通泰)한지를 점칠 수 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은 54세로 그쳤고, 법효직(法孝直)은 겨우 45세를 살았으며, 방사원(龐士元)은 가까스로 36세를 살았다. 나이 70을 넘긴 자는 글을 받들고 가서 항복을 빌었던 초주(譙周)였을 뿐이니, 하늘이 과연 한(漢)나라의 덕에 싫증을 낸 것인가.
[조선시대, 이유원]
위나라의 사마의, 곽회, 종요, 등애 등은 모두 70세 전후까지 장수하여 조비~조방의 위나라를 모두 섬긴것에 비하면 하늘이 한나라를 버린게 맞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1. 봉추(鳳雛)
방통에게는 방덕공이라는 숙부가 있었는데, 방덕공은 제갈량을 와룡(臥龍), 자신의 조카인 방통을 봉추(鳳雛), 사마휘를 수경(水鏡)이라고 후대에 부르게 한 주인공이다.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모양이다.)
<양양기>에 따르면 방덕공은 양양의 선비로 그 명성이 높아 유표가 초빙하려 했지만 천하 따위는 지켜야 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귀한 것이 아니라 말하며 거절한 인물이다. 방덕공의 아들 방산민은 제갈량의 작은 누나와 결혼했으니, 제갈량의 가문과 방통의 가문은 사돈지간이었다.
방통은 남군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고사전(高士傳), 사마휘편>에 따르면 사마휘가 영천(穎川)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2천리가 넘는 길을 찾아가 뽕잎을 따고 있는 사마휘를 만나게 되었다.
방통은 수레 위에서 말하기를
"나는 대장부가 세상에 살며 마땅히 대금(帶金, 칼을 차는 고리)하고 패자(佩紫, 자색 인수印綬를 띰. 곧 고관이 되는 것)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어찌 혼란한 세상을 되돌릴 역량이 있으면서 길쌈하는 지어미의 일을 하겠습니까?"
(뽕잎이나 따고 있는 사마휘를 비판한 것)
그러자 사마휘가
"당신은 우선 수레에서 내리시오. 당신께서는 참 샛길이 빠른 줄만 알지, 길을 잃고서 헤매게 될 것은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옛적에 백성자고(伯成子高, 요(堯) 임금 때 사람)가 짝지어 밭을 갈며 영광스러운 제후(諸侯)로 있기를 생각하지 않았고, 원헌(原憲, 공자의 제자)이 오두막집에서 살며 관사(官舍)와 바꾸지 않았습니다. 어찌 화려한 집에서 살고 살찐 말만 타고 다니며, 시녀(侍女)가 수십 명인 다음에만 기이하다 하겠습니까. 이는 곧 허유(許由)ㆍ소부(巢父)가 분개하게 여기고, 백이 숙제(伯夷叔齊)가 장탄식(長歎息)하던 일입니다. 비록 진(秦) 나라에서 절취한 벼슬과 천사(千駟)의 부(富)를 가졌더라도 그리 귀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답했다. 방통은 말했다.
"내가 변방(邊方)에서 생장하여 대의(大義)를 본 일이 적은데, 만약 한번 큰 종을 두들겨 보지 않고 우레 같은 북을 쳐보지 않았더라면, 그 울리는 소리를 알지 못할 뻔했습니다."
라며 자신의 깨달음을 사마휘에게 전했다.
사마휘는 계속 뽕잎을 따고 방통은 나무 아래에 앉아 낮부터 밤까지 대화를 나누었는데, 사마휘는 그를 매우 남다르게 여기고 남주(南州, 남부지방)선비의 출중한 인물이라 칭찬했다.
(사실 사마휘는 <삼국지연의>관련 컨텐츠에 나오는 것 처럼 호호 할아버지는 아니다. 방통의 숙부 방덕공보다 10살 정도 아래였다고 한다. 그러니 많아봤자 40~50대였을 것이다.)
2. 남군의 인사과
방통은 형주목 유표의 소속인 남군의 공조(功曹)로서 부임했다. (조조가 형주를 평정한 뒤 남군의 북쪽을 갈라서 양양군을 신설했으므로 후대에서는 방통을 양양사람이라고 한 것이다.)
공조는 하급관원들의 임용을 담당하고 근무실적을 평가하는 지금의 인사 담당자 역할이었다. 방통의 성정은 사람을 견주어 비교하는 것을 좋아하고 능력있는 자를 길러서 양성하는데 부지런했다. 사람들을 칭찬할 때 마다 그 사람이 가진 재주를 넘어 과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이유를 묻자 방통은 대답했다.
"지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바른 도가 쇠퇴하니 선인이 적고 악인이 많습니다. 바야흐로 풍속을 일으키고 도업(道業)을 기르려 하는데, 그 칭술하는 말을 아름답게 하지 않으면 명성이 흠모하며 따르기(慕企)에 부족할 것이고, 흠모하여 따르기에 부족하면 착한 일을 하는 자가 적을 것입니다. 이제 열을 뽑아 다섯을 잃는다 해도 오히려 그 절반을 얻는 것이고, 세상의 교화를 높이고 뜻있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힘쓰게 할 수 있으니 또한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쉽게 풀이하자면, 난세니까 장점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어쨌든 뽑아 써야 하며 그래야만 사람들을 모을 명분이 생기고, 그렇게 모인 사람들 중 절반이 별로라 해도 나머지 절반은 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때 신야의 유비는 사마휘를 만나 세상일에 관해 묻고 있었다. 사마휘가 말했다.
"저와 같은 유생 속사가 어찌 세상의 시무를 알겠습니까? 시무를 아는 자는 준걸 중에 있으며 이런 준걸에는 복룡과 봉추가 있습니다."
유비가 누구인지 묻자 사마휘가 다시 말해주었다.
"제갈공명과 방사원 입니다."
3. 주유의 속관
방통이 주유의 속관이었다고? 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적벽에서 주유가 대승하고 조인의 남군을 얻은 뒤 남군의 태수가 되었으니 당연히 주유의 속관이다. (그 증거는 <강표전>에 있는데, 다음 항목에서 서술해보겠다.)
주유가 병사하자 방통은 상여를 운구하여 오(吳)에 이르렀는데, 오나라 문사들은 방통의 명성을 듣고 방통이 다시 남군으로 돌아가려 할 때 함께 창문(昌門)에서 전송하기 위해 모였다. 이 자리에는 육적(陸勣), 고소(顧劭), 전종(全琮) 등이 참석했다.
방통은 말했다.
"육자(陸子, 육적의 경칭)는 노마(駑馬, 굼뜬 말)라 이를 만하니 매우 빠른 발의 힘을 지녔고, 고자(顧子, 고소)는 노우(駑牛, 굼뜬 소)라 이를 만하니 능히 무거운 짐을 지고 멀리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방통에게 다시 물었다.
"그대가 보기에 육자(陸子)가 가장 낫다는 것입니까?"
"노마(駑馬)가 비록 빼어나지만 한 사람을 감당할 뿐입니다. 노우(駑牛)는 하루에 3백리를 가니 어찌 한 사람을 중함에 비하겠습니까!"
(고소>육적 이라고 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고소는 방통의 숙소로 찾아와 방통과 대화하다가 물었다.
"경은 사람을 알아보기로 유명한데, 저와 경을 비교하면 누가 더 낫습니까?"
"세속을 도야(陶冶)하고 인물을 견종(甄綜, 품평)하는 데는 제가 경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제왕(帝王)의 비책(秘策)을 논하고 의복(倚伏, 길흉화복)의 요최(要最, 요체)를 파악하는 데는 제가 좀 더 나은 것 같습니다."
고소는 그 말에 만족해하였고 방통을 친근하게 대했다.
4. 비백리지재(非百里之才)
주유가 죽고 유비가 손권에게 형주를 빌리자, 방통은 남군의 공조에서 형주의 종사(從事, 주목의 속관)가 되었으며 유비의 명을 받아 뇌양령(耒陽令, 계양군 뇌양현의 현령)에 부임했다. 현에 있으면서 제대로 다스리지 않아 면관(免官, 면직)되었다.
그러자 오나라의 노숙은 유비에게 서신을 보내준다.
"방사원은 백리지재(百里之才, 사방 백리를 다스릴 재주. 범상한 인물)가 아니니, 치중(治中), 별가(別駕)의 임무를 맡겨야 비로소 그 뛰어난 재능을 충분히 펼칠 것입니다."
곁에 있던 제갈량도 유비에게 이를 간하자 유비가 방통을 만나 얘기를 나누어보고는 크게 평가하며 치중종사(治中從事)로 삼았다.
(방통이 못생겼다고 하는 건 <삼국지연의>의 창작이며, 뇌양현으로 장비를 파견해 방통이 일을 개잘하는것을 보고 깨달았다는 것 또한 창작이다. 근데 있을법 한 이야기다. 나관중 대단.)
선주(유비)는 방통과 함께 종용(從容, 여유있음)히 연회를 열어 대화를 나누었다. 방통에게 물었다,
"경이 주공근(周公瑾, 주유)의 공조(功曹)였을 때 내가 오(吳)에 갔었소. 듣기로 이 사람이 은밀히 중모(仲謀, 손권)에게 말해 나를 머물러 두게 할 것을 권했다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소? 주인에 속해 있을 때는 그 주인을 위하는 법이니 경은 숨김없이 말해 보시오"
방통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유비가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그때 위급하여 응당 요청할 것(형주를 빌림)이 있어 이 때문에 갈 수 밖에 없었는데, 하마터면 주유의 손을 벗어나지 못할 뻔 했구려! 천하의 지모 있는 선비들은 그 소견이 대체로 같소이다. 그때 공명이 내가 가면 안 된다고 간언하며 그 뜻이 홀로 독실했으니 또한 이 일을 우려한 것이었소. 나는 중모(仲謀)가 방비하는 곳은 북쪽이니 응당 내 도움에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 때문에 (오로 갈 것을) 결의(決意)하고 의심하지 않았소. 실로 위급한 지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만전의 계책은 아니었소."
유비는 방통을 대우함이 제갈량에 버금갔고, 마침내 제갈량과 함께 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 또는 군사장군이라고도 말함.)이 되었다.
5. 입촉
법정이 유장의 화친 사신으로 유비에게 찾아오고 난 뒤, 방통은 유비에게 말한다.
"형주는 황폐해져 사람과 물자가 고갈되었고, 동쪽으로 오(吳)의 손권이 있고 북쪽으로 조씨(曹氏)가 있어 정족지계(鼎足之計, 솥의 발 같이 굳건한 계책)의 뜻을 펼치기에 곤란합니다. 지금 익주(益州)는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강성하여, 호구수 백만에 사부병마(四部兵馬)로 나오는 바가 잘 갖춰져 있으니 보화(寶貨)를 밖에서 구할 필요 없이 지금 임시로 빌려 대사를 정할만 합니다."
유비가 답했다.
"지금 내게 있어 물과 불 같은 관계에 있는 자가 조조요. 조조가 급(急)하면 나는 관(寬, 너그러움)하고 조조가 포(暴, 사나움)하면 나는 인(仁)하고 조조가 휼(譎, 속임)하면 나는 충(忠)했으니, 매번 조조와 반대로 하여 일을 이룰 수 있었소. 지금 사소한 이유로 천하에 신의를 잃는 것은 내가 취할 바가 아니오."
방통은 유비를 설득했다.
"권변(權變, 형편에 맞추어 대응함)할 때는 오직 한 가지 길로 평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겸약공매(兼弱攻昧, 약한 자를 아울러 강한 자를 공격함)는 오백(五伯, 전국시대 오패)이 했던 일입니다. 역취순수(逆取順守, 역리로 취하되 순리로 지킴)하여 의리로 보답하고 대사가 이룬 뒤 대국(大國)에 봉해 준다면 어찌 신의에 위배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취하지 않으면 끝내 남을 이롭게 할 뿐입니다."
유비는 마침내 이를 허락했다.
장송과 법정의 계책으로 방통은 유비를 수행해 촉으로 들어갔고 제갈량은 형주에 남았다.
익주목 유장과 유비가 광한군 부현에서 만났다. 이때 방통이 계책을 올렸다.
"지금 이 모임을 틈타 유장을 붙잡는다면 장군께서는 용병의 수고로움 없이 앉아서 한 주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막 다른 나라로 들어와 은혜와 신의를 아직 드러내지 못했는데 그리 할 수는 없소."
(<삼국지연의>처럼 방통의 명을 받은 위연이 칼춤을 추고, 그에 대응해 장임이 칼춤을 추다가 유비가 노한 일화는 허구다.)
유장은 성도로 돌아갔고, 유비가 유장을 위해 북쪽으로 한중의 장로를 토벌하려 했다. 그러자 방통은 다시 계책을 내놓았다.
(이것이 상,중,하책이다.)
"은밀히 정병을 뽑아 밤낮으로 겸도(兼道,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감)해 곧바로 성도를 습격하십시오. 유장은 불무(不武, 무략이 없음)한데다 또한 평소 대비가 없어, 대군이 창졸간에 도착하면 일거에 평정할 수 있으니 이것이 상계(上計, 상책)입니다.
양회(楊懷), 고패(高沛)는 유장의 명장으로 각각 강병들을 거느리고 관두(關頭, 요긴한 길목)를 점거해 지키며, 듣기로 여러 차례 유장에게 전(牋, 상주문)을 올려 장군을 형주로 돌려보내라고 간언했다 합니다. 장군께서 이르기 전에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하고 형주에 위급한 일이 있어 되돌아가 이를 구원하려 한다고 하며, 아울러 행장을 꾸려(裝束) 겉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하십시오. 이 두 사람은 장군의 영명(英名)함에 감복하고 있었던 데다 또한 장군이 떠난다는 것에 기뻐하여 필시 경기(輕騎, 가벼운 차림의 말)를 타고 만나러 올 것이니, 장군께서 이 틈을 타 그들을 붙잡고 진격하여 그 군사를 차지하고 이내 성도로 향하십시오. 이것이 중계(中計, 중책)입니다.
백제(白帝)로 물러나 형주와 연결하고 서서히 돌아와 도모하는 것이 하계(下計, 하책)입니다. 만약 망설이며 거행하지 않으면 장차 오래지 않아 큰 곤란을 겪을 것입니다."
오늘도 읽기 귀찮은 분들을 위해 요약해보자면
상책 : 정병을 뽑아 2배로 행군해서 성도를 급습한다.
중책 : 형주에 급한 일이 있는 것 처럼 꾸며 양회, 고패로 하여금 전송하게 하고 그들을 붙잡아 군사를 차지해 성도로 진격하자.
하책 : 백제성으로 물러나 형주와 다시 연합하여 익주를 재 도모한다.
유비는 중책을 택했고, 양회와 고패를 참수했으며 황충과 탁응을 시켜 군사를 되돌려 성도로 향했다. 지나는 곳 마다 모두 이겼다.
부현에서 큰 연회를 열어 술을 차리고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그리고 유비는 방통에게 말했다.
"오늘 모임이 가히 즐겁구려."
방통은 안색을 바꾸어 말했다.
"남의 나라를 치고 즐거워하는 것은 어진 이(仁者)의 군대가 아닙니다."
유비는 술에 취해 노하여 말했다.
"무왕(武王)이 주(紂)를 치며 그 앞뒤로 노래 부르고 춤췄는데 그도 어진 이가 아니었단 말이오? 경의 말이 맞지 않소. 속히 일어나 나가시오!"
방통은 머뭇거리며 물러났다.
유비는 술이 조금 깨자 후회하고는 방통을 되돌아오도록 청했다. 방통이 다시 자리에 앉아 돌아왔으나 사죄하지 않으며 태연자약하게 먹고 마셨다. 유비가 말했다.
"조금 전의 논의에서 누가 잘못한 것이오?"
방통은 말했다.
"군신(군주와 신하)이 함께 잘못했습니다."
유비가 크게 웃으며 기뻐하여 처음처럼 술자리를 즐겼다.
습착지(習鑿齒)는 이 일화에 대해 패왕(覇王)은 필시 인의를 갖추어 이를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인데, 유비가 즐거워 하는 것은 덕의에 어긋났다고 평했다. 더불어 방통은 유비가 기뻐하는 것이 세간에 누설될까 두려워 직언을 했으니 대단하다 말했다.
배송지 또한 습착지의 말에 동의하여 정사 주석에 달아주며 '군신이 모두 함께 잘못했다는 말'은 방통이 유비에게 돌아갈 비난의 화살을 함께 나누려 한 것이라고 후하게 평해주었다.
6. 죽음
유비군은 진격하여 광한군의 낙성을 포위했다. 방통은 군사를 직접 이끌고 성을 공격하다 날아온 화살에 맞아 36살의 나이로 죽었다. 유비가 매우 애석해하여 말할 때 마다 눈물을 계속 흘렸다.
<삼국지연의>와의 다른 점은 장임은 방통이 죽기 전에 이미 유비에게 패하였고, 낙봉파라는 지명은 <삼국지연의>에서 창작된 지명이며 창작되었음에도 중국에는 낙봉파라는 지역을 만들어 관광지로 삼고 있다...
후에 방통의 부친은 의랑, 간의대부로 승진되었고, 아들 방굉은 비의의 사후 진지가 상서령으로 내정을 총괄하자 그를 경멸하여 억눌림을 받다가 부릉의 태수로 재직중에 죽게 된다. 동생 방림은 형의 관직을 이어받아 형주의 치중종사로 황권의 수하에 참여해 이릉대전에 참여했다가 패하자 황권과 함께 위나라로 투항했다. 방림은 위나라에서 열후에 봉해지고 거록태수에 이르렀다.
<계한보신찬>에서는 장존이 평소 방통에게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방통이 화살에 맞아 죽었을 때 유비가 방통을 찬미하는 말을 하자
장존은 "방통은 비록 충성을 다하여 아까운 인물이지만, 위대하고 아정한 도의를 어겼습니다." 라고 말했다.
이에 유비는 노여워하여
"방통은 자신의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 사람이오. 다시는 그를 비난하지 마시오!"
라고 말하며 장존의 관직을 파면시켰다. 오래지 않아 장존은 질병으로 죽게 된다.
260년, 유선은 관우, 장비, 마초, 황충과 함께 방통에게 시호를 내렸는데 정후(靖侯)라 했다.
7. 평가
방통은 항상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주군인 유비에게 개진한 인물이었다. 그것이 유비의 대의와는 전혀 다를 것이라는걸 알면서도 다른 측면이 항상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그렇기에 유비에게 있어 방통은 누구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계한보신찬>에서는 방통이 덕행이 지극하고, 풍아한 기질이 빛나며 영명한 군주에게 목숨을 바치고 가슴으로 충성을 발했다고 평했다.
제갈량이 정석을 기반으로 완벽하게 승리할 전략을 세웠다면, 방통은 대담하고 유동적인 상황변화에 따른 전략을 세우는 속칭 '사파'같은 전략을 세우던 사람이었다. 진수는 정사에서 방통이 사람을 견주어 보는것과 모책을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니 위나라 신하 순욱과 막상막하라고 했다.
혹자는 방통이 죽지 않았다면 관우가 형주를 잃고 죽지 않았을거라 보는데, 이는 제갈량이 형주에 남아 관우를 보좌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는 측면이지만 사실 제갈량, 조운, 장비는 유비가 양회와 고패를 처형한 시점에 이미 익주로 출병한 상태였다. 그만큼 익주는 공략하기 까다로운 곳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물론, 제갈량이 방통의 복수를 하고 장임을 붙잡아 처형한 것도 아니다. 영안과 낭중의 유장 세력이 유비의 후방을 공격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 출병한 것.
형주의 중요성을 그리 잘 알면서 제갈량을 왜 불러들였느냐 라고 한다면 유비의 실책이 맞다. 하지만 그만큼 익주는 견고한 곳이었고 당대에 장비보다 관우가 더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은 관우가 군재 뿐만 아니라 어딘가를 통치할 수 있는 통치력을 인정 받았기 때문이라 본다. 유비는 이를 믿었던 것이다. 다만 방통이 살아있었다면 법정과 더불어 이릉대전과 북벌이 어떻게 됐을지는 상상에 맡겨도 좋을 것 같다.
유비는 가족은 잃어도 서주에서 단양까지 어떻게든 핵심 막료집단은 지켜왔으나, 낙성에서 처음으로 방통을 잃은 것이 큰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고, 장존을 파면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았나 싶다. 때문에 법정도 이를 알고 유비를 수월하게 설득할 수 있었다.
제대로 활약을 하지 못하고 요절하여 명확하게 판단할 수는 없으나, 방통이 당대에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던 천재였음엔 틀림이 없어 보인다.
평가는 펨붕이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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