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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10 21:08

유물 하나를 통해 풀어보는 여러가지 이야기1 - 고구려의 유물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

조회 수 842 추천 수 12 댓글 2


curator_73_2.jpg 유물 하나를 통해 풀어보는 여러가지 이야기1  - 고구려의 유물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  curator_73_4.jpg 유물 하나를 통해 풀어보는 여러가지 이야기1  - 고구려의 유물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
 위에 사진은 539년에  제작된 경상도 의령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불상이다. 한국사 자격증을 땃던 사람이라면 익숙할지도 모르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본적이 있는 사람들은 고구려의 불상이라고 소개된 이 작은 불상을 보았을 것입니다.


 (본인은 그냥 문화재관련 학과를 졸업한 사람이고 흥미 유발을 위해 친구들끼리 얘기하던 썰 같은 것을 msg 친것 도 있습니다. 그냥 이런 관점으로 보기도 했구나 하십쇼 없던 얘기를 하려는게 아니라 이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고 얘기해보는 겁니다. )


+긴글 싫어하면 * 표시만 읽고 뒤로가기 하세요 괜히 요약 좀 이딴 댓글달지 마시고 나는 긴시간을 투자해서 정보를 제공했는데 댓글 때문에 미갤에 글올리다가 빡친 적이 한둘이 아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글도 안읽고 잘난 척 지하고 싶은말 하는 인간, 요약좀, 글과 관련없는 이야기 등 지들끼리 잘났다며 내가 맞다고 싸우기 이제 보이면 전부 차단하겠습니다


* 상부가 저렇게 찍혀있고 찌그러진 이유는 발견이 학술이나 구제발굴이 아닌 우연히 밭?을 갈다가 걸리길레 퍽퍽했는데 우지끈 한 것이라고 한다.


* 이 고구려의 불상은 북위~ 동위 서위기의 불상의 모습과 현저히 유사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불상의 뒷 명문에 첫머리의 연가(延嘉)는 고구려가 독자적으로 사용했던 연호 가운데 하나로 생각되지만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어떤 기록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명문은 텍스트 역사서의 한계를 훌륭히 메워주는 금석문 1차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연호 다음에 등장하는 간지인 기미년(己未年)은 479년, 539년, 599년에 해당합니다.


이상이 539년인 이유는 양식적으로 479년이면 우리가 북위보다 빠른 불상을 제작하니 말이 안되고 599년 이라함은 양식적으로 너무 후행하기 때문에 539년이라 보는 것이 맞따! 이는 양원왕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 아마 양원왕때 잃어버린 연호인듯하다..

 515.JPG 유물 하나를 통해 풀어보는 여러가지 이야기1  - 고구려의 유물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 (524년 북위에서 제작한 불상)12.JPG 유물 하나를 통해 풀어보는 여러가지 이야기1 - 고구려의 유물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536년 동위에서 제작한 불상)

위 두 불상이 유행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불상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이므로 비슷한 시기인 539년이 합당하다. 


뒷 시기 불상은 귀찮아서 안넣었지만 6세기말에  제작된 중국의 불상은 지역화가 되어 신체비율이 메이플 케릭터마냥 4~5등신으로 줄어든다던지 위에 상과 다르게 옷주름이 현저히 줄어들게 됩니다.


* 만들어진 것은 평양에서 만들어졌으나 어찌하여 신라땅에 있는지는 자세히는 알 수가 없다. 

    

이 상에 대해서 얘기할때 상의 출저는 대부분 중요한 연구로써 생각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머 확실히 정확히 알 수는 없는 부분이긴합니다. 신라땅에 이 불상의 존재함은 개인적 사견으로 두 가지로 보는데 하나는 혜량법사가 가져온 것으로 볼 수 있는 것과 고구려 함락 이후 옮겨온 것 두 가지의 가능성이 있을 것 같습니다.  


 혜량법사는 고구려에서 망명한 승려입니다.  삼국사기 거칠부 편에 그가 망명할 당시에 했던말이 있고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를 그대 나라로 데려가 주기를 바란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거칠부와 함께 수레를 타고 돌아와서 그를 왕에게 뵙게 하니, 왕이 승통(僧統)으로 삼았다. 비로소 백좌강회(百座講會)및 팔관(八關)의 법이 두어졌다.] 참고로 백고좌법회나 팔관회등은 황룡사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왕권강화의 목적이 담긴 의식이고 사찰인데. 거기다 승려에게 승통이라는 직책까지 주어진 것으로 보아 신라의 불교는 고구려와 같은 중국 북방불교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비전공자들에게는 이말이 어려우니 간단히 하자면 불교자체가 참선과 수행이 기본 교리이므로 사실 불교가 정치에 직접관여하지 않는 것이 불교교리에 맞으나  북방인들이(이민족들이) 중국을 통치함에 있어 중국은 그들의 사상에 도교가 있으므로 새 종교사상을 들어 기존 사상을 억누르기 위해 정치에 불교를 이용하여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써 이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불교학을 연구하는 쪽에서는 북위 남북조시대의 남방불교와 북방불교를 구분하여 연구를 하니 dbpia같은 사이트에서 읽어보도록하고)


 우리는 혜량법사의 고구려 탈출과 관련되어 고구려에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바로 연개소문의 도교체택을 알고 계실겁니다. 연개소문은 집권이후 나라안에 유교와 불교가 성행하나 도교가 그렇지 않다하며 당에게서 도교를 수용합니다. 이 여파로 인해 불교의 세력을 완전히 밀어내버렸을 것이고 이와 관련하여 혜량법사 또한 신라로 망명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시기차이는 분명히 납니다만 요지는 고구려 내부에서 불교의 영향력이 점점떨어지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고구려의 무덤을 통해 이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비전공자들에게는 그냥 굴식돌방무덤이라고 퉁치는 무덤인데 사실 이 무덤도 시기에 따라 구분합니다. 

고구려의 무덤은 다들알겠지만 돌무지무덤(적석무덤)에서 굴식돌방무덤(석실분)으로 변화하고 그 굴식돌방무덤은 또 세부적으로 구분하면 여러방을 두는 무덤(다실묘)이었다가 단실묘로 변화합니다.

그림2.gif 유물 하나를 통해 풀어보는 여러가지 이야기1 - 고구려의 유물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
( 위 사진은 안악3호분인데 다실묘 말그대로 이렇게 방을 여러개 두다가 시간이지나면  옆방 앞방 측방을 다없애버림 그와 동시에 무덤에 그리던 벽화 또한 변화하게 되요 생활과 묘주의 모습과 불교등에서 도교의 사신도만 그려놓는 등 머 사실 이실묘도 있고 한데 더 이상 얘기하면 tmi니까 이정도로 합시다.)

 다실묘

단실묘 

 생활 및 불교

사신도 



unnamed.jpg 유물 하나를 통해 풀어보는 여러가지 이야기1 - 고구려의 유물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 (이렇듯 대좌에 앉아 참선하는 불교의 모습이 보이던 인물위주의 벽화에서 시기가 지나면)
unnamed.png 유물 하나를 통해 풀어보는 여러가지 이야기1 - 고구려의 유물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
 고구려의 말기에 무덤에 저렇게 사신도만 그려넣는 식으로 변화하였는데 이는 계세관념이 변화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쉽게말해 죽고나서의 영향력이
불교가 아니라 도교란 얘기지.. 

  

 또 하나는 고구려 멸망이후 약탈되어 내려온 가능성인데, 삼국유사에는 서라벌 즉 지금의 경주를 두고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 이라는 말을 전하고 있슴다. 별이 총총하듯 사찰이 늘어져있고 탑이 기러기처럼 즐비해있다는 뜻이에요. 지금의 교회처럼 말이죠. 


 신라는 불교를 공인하고 나서 급속도로 불교를 장려하고 수도 경주에 수많은 사찰을 건립하였습니다. 이는 기존의 다신 위주의 샤먼사회에서의 종교의식을 불교라는 하나의 정신체계로 일원화하기 위함이죠, 자세히 말하면 글이 길어지고 어려우니 간단히 얘기하자면 신라는 고구려와 같은 북방불교를 수용하고 통치수단으로써 불교를 체택하고 왕이 곧 부처님과 혈연 관계임을 강조하여 자신들이 왕이되야 할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한 것이에요. 이는 이전에 신라가 박석김이 번갈라가며 왕위를 하고 있었다는 점과 김씨세습에 대한 정당성에 대한 강화를 불교를 통해 해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런 즉 그럴거면 경주에 수많은 사찰을 냅두고 저런 지방에 있다는 것은 굉장히 의아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니까 누가 몰래 숨겨왔다가 저기에 묻어놓고 못찾은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상 내 생각은 뒤로하고 (이것 저것 얘기해주려다 보니 그냥 끌어온 얘기지 사실은 아닙니다..... )


다시 상에대한 얘기를 하자면 뒤에 적힌 저명문은 아래와 같이 해석한다(국립중앙박물관 참고)

 延嘉七年歲在己未高(句)麗國樂良

東寺主敬苐子僧演師徒卌人共
造賢劫千佛流布苐卄九因現義
佛比丘法穎(?)所供養

발원문을 읽는 방식과 해석에 다소의 견해 차이가 있지만 최근에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연가 7년인 기미년에 고구려 낙랑(평양?)에 있는 동사(東寺)의 주지이며 (부처님)을 공경하는 제자인 승연을 비롯한 사도(師徒) 40인이 함께 현겁천불을 만들어 (세상에)유포한 제29번째인 인현의불(因現義佛)을 비구인 법영(?)이 공양하다.

 이 내용을 보아 알 수 있는 것은 평양에서 만들어졌다는 것 이와 같은 불상 천개를 만들었으며 이 불상은 그중 29번째 부처상이다. 라는 얘기를 전하고 있다 이말입니다.  그니까 머 이 같은게 더 있을 수도 있다 머 그런 얘기가 될 것이죠..


* 참고로 북한은 마치 다른 번수의 불상 인냥 같은 연가년의 불상을 박물관에 전시했는데 양식도 엉성해서 국내학자들은 조작이라고 보고있다.

100001_28132_3211.jpg 유물 하나를 통해 풀어보는 여러가지 이야기1 - 고구려의 유물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
북한이 연가7년명의 또 다른 불상이라고 얘기하는 불상

unnamed (2).jpg 유물 하나를 통해 풀어보는 여러가지 이야기1 - 고구려의 유물 연가7년명 금동불입상-
아래는 563년에 제작된 명문이 있는 우리나라에 있는 계미명 금동불 입상입니다. 


 북한에서 연가라고 밝히는 위의 불상은 국내에 계미명 (아래 563년)의 불상과 유사합니다. 위의 북한의 삼존불 형태의 불상은 얼굴에 과도한 볼륨감이 보이는데 위에서 보듯 당시 북위, 동위의 양식이 얼굴이 길쭉한 오이같은 형태인 것에 비해 너무 살쪄있고 뒤에 명문도 있으나 필체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궁금하면 찾아보세요 저는 필체감정은 모릅니다 ㅎㅎ (https://blog.aladin.co.kr/balmas/popup/485900)


* 불상의 손동작은 수인이라고 하며 시무외인과 여원인을 하고 있다. 두려움을 없애주고 소원을 들어주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레벨:3]홀홀홀츠 2020.04.10 22:21
    제목 자극적으로 안하면 많이는 안 볼것같아요
  • [레벨:20]호기심요정 2020.04.12 14:21
    정보 감사합니당 삼국시대 불상은 웃고 있는 모습이 많아서 더 좋은 것 같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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